사마천의 사기 들어보기는 했는데…

혹시 ‘사기’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아마 대부분 ‘거짓말’이나 ‘속임수’를 생각하실 텐데요. 하지만 오늘 제가 말씀드릴 사기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바로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서 중 하나인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말하는 것입니다.

1. 사마천과 그의 운명적 만남

사마천(司馬遷)은 기원전 145년경 전한 시대에 태어난 중국의 위대한 역사가입니다. 그는 태사령이라는 관직을 맡아 천문과 역법, 도서 관리를 담당했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 사마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직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마천의 인생은 친구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한무제의 노여움을 산 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이릉이 흉노에게 포위되어 투항한 것을 변호한 사마천은 궁형이라는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궁형은 생식기를 거세하는 형벌로, 당시로서는 사형에 버금가는 치욕적인 형벌이었습니다.

수치심으로 치를 떨던 그는 죽음을 선택하려고도 했지만,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이를 갈며 분을 삭였습니다. 바로 이런 개인적 고통과 한이 사기라는 불멸의 작품을 탄생시킨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점이 있습니다. 사마천이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을 나열한 딱딱한 연대기를 썼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기는 총 1,300여 가지의 다양한 직업군이 언급될 정도로 당시 사회의 생생한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사마천은 역사를 통해 인간의 본성과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2. 사기의 독특한 구성과 혁신적 서술 방식

《사기》는 본기(本紀)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구성된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입니다. 총 130편에 달하는 52만 6,500자의 방대한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규모만으로도 압도적입니다.

본기는 제왕의 역사를 기록하는 부분으로, 정통성을 가진 국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사마천은 독특한 기준을 적용했습니다. 항우는 한때나마 천하를 제패한 패왕으로 인정하여 세가나 열전에 서술하지 않고 본기에 서술했고, 전한의 제2대 황제인 혜제 대신 여태후의 본기를 넣었습니다. 이는 명목상의 권력자가 아닌 실질적인 권력자의 역사를 기록하겠다는 사마천의 뚜렷한 역사관을 보여줍니다.

세가는 제후국의 역사를, 열전은 왕과 제후 외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개인들을 다룹니다. 열전의 대상은 영웅, 정치가, 학자, 군인, 일반 서민까지 다양하며, 흉노를 비롯한 주변 이민족이나 서역에 대한 기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구성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습니다. 기존의 역사서들이 주로 왕조의 기록에만 치중했던 것과 달리, 사마천 사기는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을 통해 역사의 전체적인 모습을 그려내고자 했습니다.

3. 한고조 유방, 사기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인물

한고조 유방(劉邦, 기원전 246 ~ 기원전 195)은 패현 풍읍 중양리 사람으로 기원전 206년 한나라를 건국한 창업군주입니다. 하지만 그의 시작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유방에 대한 표현은 “(고조는)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색을 밝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창업군주에게 흔히 따라붙는 신령한 덕이나 높은 인품에 대한 찬양과는 거리가 먼 매우 솔직한 묘사입니다. 진 말기 농민 반란에 가담하기 전의 유방은 소위 ‘협객’으로서, 가업은 뒷전이고 주색에 빠져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평범한, 아니 오히려 문제가 많았던 인물이 어떻게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을까요? 사마천 사기는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한고조는 당대의 인물 중에서 가장 너그러운 사람이었고, 자신의 적을 그처럼 많이 용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유방은 실수를 안하는 초인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반성할 줄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는 항우와는 극단적으로 대조된 인물이었습니다. 인간성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지만 신기하게도 군주로서 가져야 할 장점만 거의 골라서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한고조는 치료를 받지 않고 의원에게 황금 오십 근을 하사하고 돌려보냈으며, 기원전 195년 4월 갑진일 장락궁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죽음 후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계속되었는데, 후날 석륵은 “짐이 만약 한나라 고조를 만났더라면 기꺼이 그의 신하가 되어 그의 지휘를 받으며 한신이나 팽월과 같은 장군들과 실력을 겨루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4. 사마천 사기가 그려낸 유방의 진정한 모습

창업군주 한고조 유방의 업적을 가능하게 했던 면은 애민과 소통, 나아가 자신은 ‘적제의 아들이다’라는 내면의 자각이었습니다. 그는 진나라의 수도를 취한 뒤 백성의 편의를 위하여 약식으로 3법만을 공포했고, 왕궁을 지을 목재로는 백성들의 집을 수리하게 했습니다.

천민으로 태어나 백성들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그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여민동락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어떠한 경우라도 수하의 말을 경청하고 따랐습니다.

사마천은 진나라 말 전쟁이 많아 사회가 혼란하였으나 유방은 전략가 장량의 여유와 노련한 경영으로 마침내 한나라 건국하는데 성공하였다고 평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능력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사마천 사기는 유방을 완벽한 인물로 미화하지 않습니다. 팽성전투에서 유방군의 사상자는 10만에 달했고 강에 시체가 쌓여 물이 흐르지 못했을 정도였으며, 유방이 항우를 피해 도망치던 때 마차를 가볍게 하고자 자신의 아이들을 마차에서 밀어 떨어뜨린 에피소드도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5. 한고조 유방 이야기가 주는 리더십의 교훈

한고조 유방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리더십의 핵심은 바로 ‘인재등용’과 ‘소통’입니다. 유방은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들을 알아보는 혜안과 그들을 품을 수 있는 포용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장량, 소하, 한신과 같은 당대 최고의 인재들이 모두 유방 곁으로 모여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는 출신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과 인격을 보고 사람을 판단했습니다. 한신이 원래 부랑자나 다름없는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군사적 재능을 알아보고 대장군으로 임명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유방이 자신을 배신했던 사람들조차 용서하고 다시 기용했다는 점입니다. 계포는 항우의 최측근으로 유방을 여러 차례 위기에 빠뜨렸지만, 항우가 패배한 후 유방은 그를 용서하고 벼슬을 내렸습니다. 이런 너그러움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유방에게 마음을 열게 만들었습니다.

현대 기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공하는 리더들은 대부분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영입하려고 합니다.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 같은 인물들도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인재들과 함께 일하면서 더 큰 성취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6. 시대를 초월한 사기의 가치와 현대적 의미

근대 중국의 위대한 문학가 루쉰은 이 위대한 역사서를 일컬어 “역사가의 빼어난 노래요, 운율 없는 이소다”라고 극찬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역사서를 넘어서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도 갖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마천은 “하늘의 뜻이 늘 옳지는 않다”라고 대답하는 것 같습니다. 작품 속 수많은 인물이 바르게, 옳게 살아갔지만, 시대의 빛을 보지 못했으니까요. 이런 사마천의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특히 한고조 유방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 어떻게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방은 술을 좋아하고 때로는 무정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역사서의 기술은 흉노를 비롯한 주변 이민족이나 서역에 대한 서술도 현재 알려져 있는 지리와 유적 발굴 등에서 판명된 당시 상황과의 정합성이 높으며, 진시황 본기의 “진시황이 자신의 무덤에 근위병 3천 인의 인형을 묻었다”는 기술에 대해서도 시안시 교외의 병마용갱 발견으로 그 정확성이 증명되었습니다. 이는 얼마나 치밀하고 정확한 역사 기록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7. 현대인이 사기에서 배울 수 있는 구체적 지혜

사마천이 궁형이라는 치욕을 견디며 완성한 이 거대한 작품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실용적 지혜를 제공합니다. 특히 비즈니스나 인간관계에서 적용할 수 있는 교훈들이 가득합니다.

첫째,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사고방식입니다. 한고조 유방은 여러 차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지만, 매번 그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바꿔나갔습니다. 팽성 대패 후에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더 체계적인 전략을 수립해 최종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둘째, 네트워크의 중요성입니다. 유방의 성공 뒤에는 든든한 인적 네트워크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려운 시절부터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겼고, 이것이 나중에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진정성 있는 인간관계가 성공의 열쇠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셋째, 지속적인 학습과 성장입니다. 유방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려는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이런 학습능력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8. 사마천 사기가 현대 한국인에게 주는 메시지

한국인들이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유방이 보여준 ‘역경 극복의 정신’입니다. 그는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또한 유방의 ‘소통과 협력’의 리더십은 오늘날 조직 문화에서도 매우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는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하지 않았고, 각자의 전문성을 인정하며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현대의 팀워크와 협업 문화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특히 한국의 기업 문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권위주의적 리더십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유방은 신분이 낮은 사람이라도 좋은 의견이 있으면 기꺼이 받아들였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9. 사기 읽기의 실용적 가이드

많은 분들이 사기를 읽고 싶어 하지만 그 방대한 분량 때문에 망설이곤 합니다. 하지만 사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관심 있는 인물의 열전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한고조 유방에 관심이 있다면 「고조본기」부터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항우본기」를 읽으면 같은 시대를 살았던 두 영웅의 대조적인 모습을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장량열전」, 「소하열전」, 「한신열전」 등을 읽으면 유방 주변의 인재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현대의 완역본들은 대부분 주석이 잘 되어 있어서 고대 중국의 배경지식이 없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각 편마다 독립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어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더 깊이 읽고 싶다면 사마천이 각 편의 끝에 남긴 ‘태사공왈(太史公曰)’ 부분을 주목해보세요. 여기에는 사마천 자신의 견해와 감상이 담겨 있어서 그의 역사관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결론: 불멸의 역사서가 전하는 교훈

사마천의 무덤으로 올라가는 문 입구에는 ‘사필소세(史筆昭世)’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역사가의 붓이 세상을 밝힌다’라는 의미로, 이는 작품의 본질을 한 마디로 표현한 말입니다.

이 위대한 역사서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이며, 권력과 명예, 욕망과 이상이 뒤엉킨 복잡한 인간사에 대한 냉철한 관찰입니다. 특히 한고조 유방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 어떻게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는지, 진정한 리더십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권력을 둘러싼 갈등이 있고, 개인의 욕망과 사회적 이상 사이의 갈등이 존재합니다. 경쟁이 치열한 현대 사회에서 생존하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유방이 보여준 것처럼 유연함과 포용력, 그리고 끊임없는 학습 의지가 필요합니다.

한고조 유방처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더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용기,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겸손함,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끈기. 이런 덕목들은 작품을 통해 전해지는 시대를 초월한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사마천이 보여준 ‘진실 추구의 정신’도 우리가 본받아야 할 태도입니다. 그는 개인적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가짜뉴스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진실에 대한 의지는 더욱 소중한 가치입니다.

결국 이 불멸의 작품은 ‘역사가의 붓이 세상을 밝힌다’는 그 이름처럼, 오늘날에도 우리의 삶을 비추는 등불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후세에 전해지며, 인류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데 귀중한 지침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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